드라마가 끝나고 포털과 커뮤니티에 찬사로 도배될 줄 알았던 내 생각이 조금 빗나갔나 보다. 원작을 사랑하는 일부 팬들이 드라마와 작가, 제작진을 비판하고 그 비판을 지지하는 의견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주요 요지는 결말과 마지막 회 추격신을 두고 가루가 되게 까는 거 같은데.. 


정작가 나대지 마라.
뽕에 취해 원작을 거하게 말아먹었다.
입에 넣어준 숟가락을 뱉은 꼴이다.
용두사미가 아니라 용두사망수준이다.

이런 글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 마음이 아프구나.
할 말이 태산이지만, 문제되는 몇 개만 거론해보겠다.
원작이나 읽고 쉴드치라고 비난하지 마라. 나또한 미생이 다음에 연재된 시기부터 빠였고, 단행본도 나오자 마자 정가주고 산 골수팬이다.


불필요한 추격신?
왜 불필요한가.
장그래는 대기업에서 나와 중소기업의 상사로 거취를 옮겼다. 대기업의 협력업체가 된 셈이다.
상사의 일은 본질적으로 현장에서 물건을 구하고 가격을 책정해서 납품하여 돈을 받는 것이다. 그 와중에 크고 작은 사고가 빈번하고 손해와 이익이 순식간에 갈린다. 이제 장그래는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며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을 수 없다. 현장에서 사고를 처리하며 위기를 막아내야 한다.
1회와 20회에 나온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는 신이 과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원작을 읽어보기나 했냐는 식은 곤란하다. 


단행본 1권이다.

바둑밖에 모르던 장그래가 세상으로 처음 나가는 길이다. 앞에 무엇이 보이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무작정 날고 있다. 작가와 제작진은 이 표지를 보며 생각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어디에 배치할 지 아끼고 아껴 오차장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장그래에게 주었다.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지만 그는 확신을 가지고 날았다. 그리고 결국 사고를 일으킨 사람을 잡는데 성공했다.

원작에 대한 오마주로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원작 붕괴라니... 

그러지 마라. 정말 부탁한다.

참고로 정작가는 1회 대본을만 20번 썼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가볍게 쓴 써내려간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원작과 다른 결말

무조건 원작과 결말이 다르고, 원작의 결말이 좋다는데 솔직히 어떤 결말을 말하는 지 모르겠다. 김대리가 그림자로 비춰지며 합류할 것을 암시하는 결말이 담백해서 좋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단행본 마지막 권에는 새로운 에피소드 컷이 있다.


요르단에 가서 장그래가 허둥대고 있다. 

장그래는 정말 요르단에 갔다. 부장이 된 오차장에게 업무지시를 받고있다. 얼굴에 당혹감이 짙다. 장그래의 성격상 얼굴에 당혹감을 드러내는 일이 잦을까 생각해보자. 장그래는 왜그렇게 쩔쩔매고 있는가. 해외업무가 처음이라서? 현지 조력자도 있을테고, 처음이라면 동행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장그래는 처음 하는 일에 쩔쩔매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의 첫 출근을 상기해보라.

이제 드라마처럼 현지에서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보자. 납품업체에서 한 직원이 샘플을 들고 튀었다. 잡아야 한다. 

.....

매끄럽지 않은가.

더구나 시즌2 제작을 염두해야 하는 시점이다. 일을 배우는 장그래의 모습이 아닌, 일을 해내는 장그래의 모습의 예고를 보여줘야 한다. 전과는 다르게 자신감이 넘치고 판단력은 더욱 빨라져있어야 한다. 이것을 두고 원작과 다른 결말이라 볼 수 있는가. 나에겐 이보다 더 좋은 결말은 없었다.





여성비하 에피소드

선차장과 안영이는 드라마 내내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온갖 비하발언을 듣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드라마 내내 그녀들은 참는다. 일한다. 참는다. 일한다. 그러다 힘들면 한숨을 쉬고 다시 일한다. 

드라마는 20회 내내 불친절했다. 시청자는 그녀들이 실력으로 남자 사원들을 제압하고 당당히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어느 대기업도 그러한 판타지가 실현되는 곳은 없다. 잊지 말자. 우리들이 미생에 열광했던 것의 첫걸음은 잔혹하리만큼 우리의 일상을 그렸던 리얼리티였음을. 

대신에 그녀들은 20회 내내 지혜롭고 현명했다.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아직은 살아남은 선차장과 안영이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것, 그것이 리얼리티의 전부인 세상이다.

원작을 망쳤다는 이야기는 곧 원작에선 드라마처럼 심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뜻이리라. 모르겠다. 어떠한 한 부분을 강조하여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왜 문제가 되는지. 정말로 제작진이 여성 직장인을 비하하고 싶었다면 그렇게 그녀들을 힘든 자리에 있게 했을까.




작가의 필력 부족

표준어는 아니지만 드라마 판에서 통용되는 '아마'라는 단어가 있다. 드라마의 '한 방' 내지는 가장 중요한 장면을 뜻하는 속어다. 보통 우리들이 명장면이라 부르며 인구에 회자되는 것들이 작가들이 공들여 만들어낸 '야마'이다. 

드라마의 에피소드마다 무수히 많은 야마들이 있었고, 그 야마엔 원작의 대사들이 인용되었다. 그 점을 두고 정윤경 작가의 자질능력이 의심된다는 얘기가 나왔다. 솔직히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작가지만, 내가 너무 억울해진다. 

조각조각 흩어진 에피소드들을 다시 쪼개고 붙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지문과 대사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다보면 자신의 필체가 드러난다. 몰입해서 쓰다보면 묘하게 원작과 뒤틀려있다. 급하게 나온 에피소드를 연결시키고 시청자를 이해시키는 상황을 두 씬만 넣어도 이미 원작과는 거리가 멀어져있다. 그런 대본에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인용했다는 것. 그것은 한 사람이 죽을 힘을 다해서 자신의 필체를 버리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이 되기위해 노력했다는 뜻이다. 원작의 대사를 야마로 만든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말도 안되게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다. 필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필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외 전무의 에피가 부족했다는 점, 안 부족했다. 난 장그래가 오차장에게 말도 못하고 방에서 무릎꿇고 울던 장면에서 너무 슬퍼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원작 반이라도 따라가라, 내가 보기엔 원작을 넘었다 이사람아.

강대리가 여자취향 안 맞는다고 삐지는 사람이었나, 그만큼 친해진 거다. 안영이는 처음부터 동기들이랑 장난쳤나

한석율이 파파라치 왠말이냐, 책상에 앉아있는 것보다 나가서 돌아다니는 게 성격에 맞는 애다. 걔 원래 그런 애다. 여자 엉덩이 만지고 그랬던 애다.


칭찬할 건 칭찬해주자.


장그래에게 같이 일하자고 오차장은 (아마도 김대리에게 주소를 물어서) 집까지 찾아왔다.

같이 일할 사람에게 전화로 소리치는 부분이 못내 걸렸던 거지.

혼자 남은 천과장이 홀로 옥상에서 한숨을 쉬고 있다.

어느 캐릭터 하나 붕괴되지 않고 오롯이 다 살아있는 거지.

원작보다 훌륭한 점은 20회 통털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굳이 하나의 흠을 잡자면 성대리가 마지막에 얻어 맞은 거?

그 장면도 나는 고마웠다. 안 그랬음 내가 우리 개벽이를 어떻게 보내겠나.



김연아가 마지막 피겨를 최선을 다해 돌고서도 은메달을 땄던 일이 생각이 난다. 내 마음속에 금메달은 연아였듯이 드라마 미생은 2014 최고 드라마였다.

말로는 못할 고마움이지만 그래도 말로밖에 할 수 없으니 재차 말할 수 밖에.


진정 고마웠다. 미생.


Posted by 오드리 byod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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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미생 정말 인생 최고의 드라마였다는

    2016.08.11 10:36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