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서재2015. 4. 27. 18:55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맥빠지는 글은 평론가의 글일 거라고.

소설은 발랄한데 평론은 학문적으로 진지 먹고 쓴 궁서체가 가득이라든지, 영화는 잔잔한데 평론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으로 영화의 장르마저 바꾸고 있다든지, 내가 주로 읽어온 평론들은 그렇게 원래의 컨텐츠와는 반전되는 매력이 있었다. 내가 평론에서 원한 건 감동과 재미의 연장선에서 얻어지는 가벼운 지식이었지만 평론가들은 '세상의 깊은 지식'을 지면에 빽빽히 쏟아냈다. 

지금도 이런 상황과 유사한 평론을 하나 읽고 있는데 짧게 소개해도 되나? 싫어할 거 같지만 그냥 하련다.

동해안 별신굿 중에 나오는 골매기 할배에 대한 이야기다. 


할배는 할매랑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할매가 집 나간다. 놀란 할배는 할매를 찾아 동네를 뒤진다. 이윽고 마을의 젊은 이장네 집에서 할매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둘이 바람난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 할배는 계속 할매를 찾아다니지만 계속해서 할매가 다른 놈이랑 바람핀 정황만 포착할 뿐이다.


나는 이 내용을 읽으며 할배 불쌍해서 어쩌노, 밥은 우째 챙겨먹을까, 할매 기력도 좋소, 다 늙어서 무슨 추태요, 해가며 몰입해 나가고 있는데 돌연 이야기의 흐름을 끊더니 학자라는 사람이 나와서는

"할배가 아닌 할매가 바람을 피고 다닌 것은 생산성이 여성에게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할매가 돌아다니면서 끊임 없이 생산성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 굿이 풍어제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라고 하고 있다.

........맥이 탁 풀린다.

내가 기대한 건 할배가 바람핀 할매는 찾았는지, 할매는 뭐라고 변명했는지, 할배는 어떻게 받았들였으며, 화해는 왜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의견이었지만 결론은 동해안 별신굿 중에 풍어제와의 연관성이었다.

에이씨, 이런 평론 집어 치우라 그래. ㅠㅠ


(우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자세를 바로잡으며)Any way,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평론가들이 쓴 책이나 원래의 컨텐츠를 2차로 가공한 글들은 가능하면 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세상만사 다 뜻대로 되도 책농사만큼은 마음대로 안되는 법, 그 뒤로도 꾸준히 알라딘의 호갱임을 자처하며 이러한 류의 책을 담아오고 있던 중에 올레! 한 권 건진다. 이제 그 책을 소개할 건데 그 전에 우리집 화장실부터 봐야한다. 왜냐면 내가 이 책을 주로 화장실에 읽었거든.




여러모로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책이다. 

심각하지 않고, 술술 읽히는 문장에, 챕터 챕터 짧게 짧게 나뉘어져있기 까지 하다.

작은 일을 볼 땐 어림 없지만 큰 일을 볼 적에는 때에 따라 10 챕터까지 가능할 것이다. 

짧은 사색의 시간 조차 허투루 날려보내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가 참으로 기특하지만 여러분은 절대 따라하시면 안됩니다. 변비의 지름길, 치질의 원인이 됩니다.








이제 변기에 앉아 책을 책을 좀 보겠다. 

(거 참, 너무 뭐라 그러지 말자. 우리집 화장실 깨끗해. 남편이가 자주 청소한단 말이다)

책의 제목이 보다시피 [영화처럼 사랑을 요리하다]이다. 추측하다시피 영화에 나오는 음식에 관한 얘기들이고, 당연히 읽으면서 식욕이 부풀어 오른다.

그래, 나 싸면서 먹는 거 생각하는 여자다. 짐승같다고 욕할라면 해도 된다. 까짓 거 '반사'를 외쳐주지 뭐.










정확히 세 보진 않았는데 대략 서른 편의 영화와 음식이 소개된다. 그리고 보다시피 영화에 알맞는 일러스트와 경쾌한 편집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 책의 최대 강점은 영화의 줄거리 요약에 있다. 

영화에 스며든 음식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저자는 줄거리를 완벽하게 오픈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본문의 절반 이상이 줄거리이다. 본인의 생각도 모두 줄거리 안에 포함시켜 버린다. 줄거리를 얼마나 잘 썼는지 영화를 보지 않고서도 본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당부한다. 이 책은 온통 스포일러로 점철되어 있으니 영화를 보신 후 읽어 달라고.

뭐 나같은 종자야 스포일러에 환장하는 부류라서 저자의 말은 무시하고 읽어 내려갔으나, 스포일러 혐오하는 분들은 이 책 꼭 피해야 한다. 분명히 몸에 해로울 것이다. 나는 여태까지 이렇게 완벽한 스포일러는 처음 봤으니까.

하나 소개하자면 이렇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줄거리 첫 문장이다.


화면이 열리면, 스팅의 <Angel Eyes>가 흐른다. 
"눈은 영혼의 창이자 마음의 문이다."
비록 거리의 여자이지만 그녀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은 천사의 눈과 같다는 노래가 영화의 내용을 예고해준다.

벤(니콜라스 케이지)은 L.A.에서 활동하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 그는 심한 알코올 중독자다.
<중략>

마치 잘 쓴 시놉시스같다. 묘사는 눈에 보일 듯이 가깝고 감정은 빠르게 와 닿는다. 쉽게 영화에 빨려들어가고 주인공들이 음식을 마주하는 장면까지 쉽게 도달한다. 이제 막 천사같은 세라가 알코올 중독자이자 난봉꾼인 벤에게 볶음밥을 해주고 있다. 나는 저자가 묘사한 줄거리를 보며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 [러브레터]의 음식은 스끼야끼이다. 

이번에 좀 끼워 맞춘 구석이 느껴지지만 목표점인 스끼야끼에 도착하기 위해 풀어논 줄거리는 역시나 좋았다. 왜 이렇게 계속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 원래의 컨텐츠에 충실한 줄거리를 무기로 내놓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내렸다.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영화의 감동을 무리 없게 이어주는 것이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는 칠면조 요리다. 

주인공이 추수감사절에 가족의 품이 그리워 찾아가지만 문전박대당하는 장면을 조망하고 있다. 그는 칠면조 요리에는 손도 못 댄 채 쫒겨난다. 그리고는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 영화가 이런 내용이었나? 탱고를 추는 장면 밖에 기억이 안나는 영화의 재발견이다. 그 밖에도 [첨밀밀]의 떡국, [화양연화]의 국수, [봄날은 간다]의 라면, [레옹]의 흰우유, [글루미 선데이]의 비프롤 등은 영화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복기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영화라는데 다행스럽고, 그 것들을 잊지 않고 한 번 더 보게 만들어 줘서 고맙다. 










영화처럼 사랑을 요리하다(식탁 위에 차려진 맛있는 영화 이야기)

저자
송정림 지음
출판사
예담. | 2008-11-0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영화와 요리의 행복한 만남-감성과 추억의 배달부영화 속 주인공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오드리 byod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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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가 자살을 준비하지만 이를 눈치챈 남학생의 만류때문에 결국 마음을 바꾸죠. 그리고 그 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내재판이 열리는 날 알파치노가 영화처럼 나타나 그 학생을 변호라고 어른스럽지 못한 교장을 질책합니다. 알파치노는 안죽었어용 ㅎㅎㅎ

    2015.04.27 20:05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