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책상머리2015.05.18 05:05


지방 4년제를 졸업한 나는 예나 지금이나 학력 콤플렉스가 상당한 수준이다. 명문대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인재들에게 이유 없이 꼬투리를 잡아 시기하거나 근거 없는 억측을 마음 속으로 일삼는다.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있을 동안 나는 레포트 우라까이를 하며 청춘을 낭비해 놓고는 손 쉽게 세상 탓을 해왔다. 왜 모르겠나. 나는 전형적인 못난 년이다.

컴플렉스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명문대생이라면 무조건 오빠라고 부를 마음의 준비를 하며 20대를 보냈던 것 같다. S대 다니는 오빠라고 해서 S급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들 앞에선 유난히 잘 웃게 되었고, K모 공대를 다니는 오빠 앞에선 나도 모르게 교태를 방출했다.


어쩌다 사귀게 된 그 오빠 역시 명문대생이었다. 아버지가 무슨 기업의 회장님이셨고 광주출신이었다. 오빠의 형제도 명문대, 친구들도 모두 명문대에 재학 중이었다. 오, 이거시 바로 끼리끼리 논다는 거신가. 명문대 그룹에 잔뜩 주늑이 들었던 나는 오빠 내가 비록 지방 사립대을 다니는 볼품 없는 여자지만 그래도 역사 개념은 좀 있어요, 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나는 오빠에게 5.18 민주화 운동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우린 모두 광주 시민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오빠 고향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거라구요

. 아후~ 빨리 그 전대갈 죽어야 하는데..."

기특하다고 칭찬받을 줄 알았던 나의 그러한 발언은 늘 애꿎은 오빠의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만 소환했다.


오빠는 광주에서도 명문고에 재학했다고 한다. 학급의 반장을 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고, 어울려 노는 친구들도 성적이 좋았다. 오빠는 자신이 공부를 잘 했던 것은 맞아가며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 고등학교를 통 털어 기억 나는 것은 늘 선생에게 맞은 일화 뿐이라고. 성적이 조금이라도 내려가면 엉덩이에 피가 맺힐 정도로 맞았고, 그런 날에는 집에 걸어가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맞은 엉덩이 부분의 상처에 맺힌 피고름에 교복이 달라붙어 고통이 심해지면 부모님은 학교로 찾아와 선생님을 뵙고 우리 아들 잘 가르쳐주셔서 허벌나게 감사합니다. 더 때려가며 사람 맹글어주쇼, 했다고 한다. 

5.18이라는 희대의 살육 현장을 겪은 시민들은 합법적으로 국가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고자 자식들을 명문대에 보내기로 결의한 것이다. 나라의 요직에 자신의 자식들을 비치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겠다는 대의 명분앞에 정작 구타에 상처 입은 학생의 트라우마는 기실 별 것도 아니었으리라. 허연 담배연기를 뿜으며 허공에 뱉은 오빠의 대사가 기억난다.

"군대에서도 선임들에게 많이 맞았는데, 선생새끼한테 맞은 거에 비하면 그건 맞은 것도 아니더라"

함께 어울렸던 오빠의 고등학교 동창도 구타 에피소드 부자임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맞아야 했던 이유를 잊지 않고 내게 쏟아냈다. 그건 마치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의 색상이 너무 예뻐서 막걸리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리처럼, 국문과 학생들이 일주일에 일곱 번 술마시는 이유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빠는 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의 소유자였고 그걸 지켜보는 나는 내내 오빠와 전쟁같은 사랑을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잘 벗어나(?) 다른 명문대 오빠로 갈아탔다. (으응?)

지금 생각해보면 남친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냅다 내빼는 여친을 보며 그 오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반성의 시간 3초)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오빠와 오빠의 친구는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명문대에 안착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졸업하는 학기 내내 수업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고, 방종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친구들에게 광주는 자랑스러운 도시였지만 정작 그에겐 잊고 싶은 고향이었다. 가끔 전라도를 비방하는 사람을 만나도 무력했고 정치적인 언급을 삼갔다. 그리고 때때로 자주 허무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명문대만 보내놓으면 될 거라 믿었던 어른들과 오래도록 체벌과 주입식 교육의 부작용에서 허덕이는 아이들 모두 5.18의 피해자는 아니었는지.




<거 참, 적절한 짤이십니다>





전해 듣기로 아직도 그 오빠는 여전히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누군가와 함께라고 하기도 하고, 어쩌면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과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에서 행복한 거 같기도 하다. 그 오빠와의 일화를 조금 털어놓자 지인은 내게 모든 광주의 청년들이 그렇게 심한 체벌을 겪은 것도,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브코올스 그렇겠고, 밝고 명랑한 광주 출신 오빠들이 더 많겠다. 그런데 어쩌겠나. 내가 겪은 오빠가 그런 오빠라서 어두운 면을 봐버렸는데..

오늘이 5월 18일이라 그런가, 문든 그 오빠가 떠올랐다. 그리고 주접스럽고 오지랖스럽게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오빠, 지금도 술 마시면 선생에게 맞은 기억을 떠올리려나...


Posted by 오드리 byod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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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 무식하게도 그렇게들 공부 시켰죠... 고등학교때 성적 좋은걸로 남은 인생을 평가해 버리는 구조라 부모들의 심정은 알 듯도 한데... 정작 중요한건 잊고 삽디다. 행복이라는 단어요. 저는 그 질문을 한국을 떠나 다른 분께 들었어요. Are you happy?

    2015.05.19 18:0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